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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글] 갑연+암주 (4/7p)

​비닐봉다리

<然의 경우>

 

   이건 꿈일까, 아니면 정말로 하늘의 전지전능한 누군가가 내려준 기회인걸까. 갑연은 눈을 깜박였다. 눈꺼풀을 닫을 때마다 시야가 가려졌다. 희끄무레하고 누렇게 바랬던 주변의 색이 좀 더 선명해졌다. 볼을 손끝으로 툭툭 쳐보았다. 둔탁한 울림이 입안에 울리며 손가락의 압력이 느껴졌다. 꿈이 아닌 거 같다. 익숙하지만 ‘지금’과는 다른 풍경이 주변을 메꾸고 있었다. 왁자지껄 뛰어나며 소리치는 어린아이들의 소리가 거슬렸다. 겪어보지 것들을 보란 듯이 누리고 있는 꼴을 보고 있자니 애써 억누르던 감정이 명치를 뭉근하게 눌렀다. 우선 이 자리를 벗어나야겠어. 바삐 발을 움직이려는 찰나, 아주 작은 인영과 몸을 부딪치고 말았다. 신체적 접촉도 충분히 가능하다는 추가적인 사실을 알아냄과 동시에, 순간 얼어붙고 말았다. 낯익다 못해 언제나 보았던 보랏빛 머리카락, 겨우 제 다리높이에 겨우 닿을까 말까 한 자그마한 키, 마침내 마주한 눈동자. 당황한 빛이 역력한 얼굴로 눈동자를 굴리더니 우물쭈물 사과를 하는 모양새를 저도 모르게 멀뚱히 쳐다보기만 했다.

   이내 다급한 목소리와 함께 제 앞의 아이보다 조금 큰 어린아이가 뛰어오는 것이 보였다. 그와 동시에 또 새로운 사실을 알았다. 그래, 너에겐 어린 동생이 하나 있었더랬지. 멀리서부터 뛰어온 탓에 분명 버거울 것이 분명한데도, 인위적인 가쁜 숨과 땀방울 흘리지 않는 부조화, 서슬 퍼런 담홍색 눈동자, 그리고 긴장감을 담은 침 삼킴이, 네가 살아온 길을 보여주고 있었다.

   경계하는 눈빛을 애써 숨기며 너는 내게 흔한 눈인사조차 건네지 않고 동생의 손을 잡아끌었다. 직감적으로 느꼈다. 내가 지금 여기에 온 것은, 선택권을 준 것이라는 걸. 어디에도 방법은커녕 선택지조차 없건만, 어린 너를 내가 어찌한다면, 무언가 달라질 수 있을지도 모른다는 가능성.

   “꼬마야.”

   너를 부르자 가시라도 쏘아댈 것만 같은 눈빛은 여전한 채로 나를 보았다. 묻지 않아도 알 수 있었다. 도대체 무슨 할 말이 있어 저를 불러 세웠냐는 아니꼬운 표정으로 보는 너를 눈으로 좇으며 간단명료하게 생각을 나열했다. 네 동생은 죽임을 당할 것이고, 너는 몇 년 뒤 가까스로 살아남아 모두를 죽이며 삶을 연명하겠지. 그런 너를 찾은 건 오직 나일 테고, 너를 필요로 한 것도 오직 나뿐이다. 아직 아무것도 모르면서도 살아남기 위해 발버둥치는 지금의 너를, 만일 내가 정말로 어찌할 수 있다면, 훗날 너를 찾지 못할지도 모른다. 더는 생각할 필요도 없었다.

 

   너를 바꿔서는 안된다. 너를 필요로 하기 때문에.

 

   “…아무것도 아니란다. 가보렴.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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